돈이 좋긴 좋구나. 모처럼 편안하게 잤다. 개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고 습기에 쩔어있을 필요도 없고 씻을 걱정 안해도 되고 충전 걱정 안해도 되고 천국이 따로없다. 아침예배만 아니면 느긋하게 나을텐데 말이지. 교회를 나서는 발걸음이 이렇게 무거웠던 적은 처음이다. 어릴땐 그렇게 가기 싫었는데…^^;;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고 지난 밤 사이 자전거는 녹이 슬어 버렸다. 다행히 체인 일부분이지만 유랑인의 속은 타들어간다. 자전거도 자전거지만 이대로 여행을 계속 할 수 있을지가 걱정 되었다. 일단 지우펀 노숙지(팔각정)로 향했다.
노숙지에 도착하니 빗방울은 동남아의 스콜처럼 굵어지기 시작했다. 옴짝달싹 못하고 멍하게 앉아 있는데 한 아저씨가 차를 세우더니 팔각정으로 들어와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다가가 인사를 건네니 반갑게 답하던 그는 일본인 관광객을 타이페이에서 지우펀까지 실어 나르는 기사님이었다. 그는 여행에 필요한 여러가지 정보를 알려주었는데, 특히 생존 중국어는 앞으로의 여행을 진행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노파심에 여기 텐트를 쳐도 안전한지 물어보니 안전하다고 한다. 경찰이 제지하거나 하진 않냐고도 물으니 걱정 붙들어 매란다. ^^
비는 내일까지 이어질 것이고 유랑인이 앞으로 갈 이란(Yilan)과 화롄(Hualian)은 지금 내리는 비(샤유이)보다 더큰비(타유이)가 내리고 있어 위험하다고 했다. 내일까지는 여기 있다가 비가 그치만 움직이라고 충고해 주셨다. 팔각정에 텐트를 다시 치는 동안 지우펀에 다녀온 그는 먹을거리 하나를 건네주고 돌아갔다. 팥죽 같은건데 따뜻한 국물(?)에 떡이 많이 들어가 있어 차가운 속을 달래는덴 최고였다. 아저씨의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다음날도 비는 이어졌다. 대만에 온지도 어언 9일 째. 한국에 있을 땐 푸른꿈에 부풀어 별 문제없이 즐겁게 여행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비 때문에 3일이나 고립되 지우펀 노숙지(팔각정)에서 떠돌이 개들과 노숙생활. 자전거는 점점 녹이 슬어가고, 비는 더 굵어지기만 하고…그나마 먹거리가 싸서 버티고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상황이 나빠지면서 유랑인의 마음은 병들어 버린지 오래고 모든게 서럽기만 했다. 따뜻한 밥도 먹고 싶고, 따뜻한 방에서 자고 싶고, 가족도 보고 싶고……대만 자전거 여행을 그만두란 하늘의 계시인 것일까? 2박 3일로 울산 포항 한 번 다녀온거 가지고 기분 내기만 급급해, 장거리 자전거 여행을 우습게 생각한 댓가를 받고 있는 것일까? 한 편으로는 오기가 생긴다. 모든일에 어중이 떠중이었던 나. 어떤일을 제대로 마무리 하지 않았던 나. 이번 만큼은 보기좋게 끝을 맺고 싶었다.
‘좋아하는 여행 아닌가? 좋아하는건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래, 다시 한 번 해보는거야…….’
노숙지 – 지우펀 부근 팔각정
전체평가(별 5개 만점) : ★★
다시 왔을땐 바닥이 조금 불결했다. 떠돌이 개들이 뒹굴어서 그런 듯. 거기에 비까지 와서 냄새는 올라오고 최악이었다.